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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톤 터커 Preston Tucker (1909~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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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2:54 조회13,17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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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852의 적은 자본금으로 시작해 회사 설립과 20여년이나 앞선 혁신적인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의 빅3를 놀라게 한 전설적인 자동차 기업가 프레스톤 터커.
 
터커는 1909년 디트로이트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캐딜락 자동차공장 기술부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전단을 나눠주는 사환으로 일하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그후 포드의 조립기능공을 거쳐 스튜드베이커, 닷지, 패커드에서 판매사원으로 일하는등 다양한 직업을 거치면서 드라이버에게 안전과 편안함을 주는 자동차를 자신의 이름으로 판매하고자 하는 그의 꿈을 잃지 않았다.
터커는 영업에 남다른 소질을 지니고 있었는데, 머리 속에 구상하고 있던 자동차와 자동차회사에 대한 아이디어를 팔 수 있을 정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터커는 터커 토피도(Tucker Torpedo)라는 스포츠카를 만들 계획으로 주변의 친구들을 모았으나, 다시 세단을 만드는 쪽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1946년 말 터커는 시카고에서 전쟁 중 B-29 폭격기를 생산했던 닷지(Dodge)社의 항공기 생산 공장을 임대해 터커주식회사(Tucker Corporation)를 설립했다. 그는 겨우 36,852달러를 가지고 시작했지만, 주식 발행, 대리점 매각, 고객들의 선불 입금 등으로 1년 만에 1,200만달러의 자본을 모을 수 있었다.

1948년 터커는 자신이 만든 차를 '50년 만에 나온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차'라고 선전했다. 가격은 2,450달러에, 그 해에 1,000대 생산이 가능하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디트로이트의 3대 회사인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1949년 미국 증권감독위원회를 통해 사기 및 다른 경제 범죄 혐의로 터커를 고발하게 되었다. 터커는 법정에서 맞섰지만, 의외로 반대세력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1950년 여름 최종재판이 열리던 날 그는 법정에서 이렇게 외쳤다. "거대한 힘이 개인의 아이디어와 자유를 짓누르는 것은 이 나라의 장래를 말살시키는 행위이며, 내가 태어난 조국이 나에게 준 고통과 슬픔이다. 언젠가는 미국의 차가 위협을 받을지 누가 알겠는가. 한때 적국인 나라에서 자동차나 라디오를 사들여야 하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나는 조국의 건전한 양심을 믿으며 아메리카의 꿈 또한 영원하리라 믿는다" 라고 결백을 외쳤다. 어쨌든 이러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터커는 승소하였고 1950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브라질에서 새로운 자동차 프로젝트를 추진하다가 1956년 47세의 나이에 폐암으로 죽었다.   
 
터커 자동차는 전세계적으로 51대가 남아 있는데, 이 차들을 금세기 최고의 차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품질과 내구성은 언론에서 발표한 것보다 훨씬 뛰어났던 것 같다. 그러나 터커가 자동차 산업에 뛰어 들어 이루어낸 일만큼은 금세기에 가장 야심찬 일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터커의 행적은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쳐서, 1988년 프랜시스 코폴라(Francis Coppola) 감독이 제프 브릿지즈(Jeff Bridges)를 터커역으로 캐스팅해 "미국의 꿈 터커"라는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에 상영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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