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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트 코드 Errett Lobban Cord (1894~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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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2:51 조회6,114 회 댓글0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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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트 코드는 개인과 대중교통을 성숙의 단계로 이끌었던 사람중의 한사람이며 탁월하고 전략적인 사업가 였다.
그는 또 어번,듀센버그,코드등 당시의 쟁쟁했던 자동차회사들을 이끌었던 경영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그의 코드제국 (1929-1937)은 어번 자동차 회사, 듀센버그(Duesenberg)자동차 회사, 센츄리 에어 라인(Century Air lines), 스틴손(Stinson) 항공기 회사, 라이콤밍 메뉴팩처링 회사 (Lycoming Manufacturing Company)와 자동차 부품회사, 항공과 조선회사등 60여개의 다양한 자회사들을 가진 대그룹이었다. 평소 자동차산업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던 코드는 1924년 어려움을 겪고 있던 오번자동차를 회생시켜보려는 자신감을 가지고 인디아나주의 어번으로 오게 되었다. 그는 종래의 급여를 거절하고 스톡옵션(Stock option)과 이익분배권(Profit Percentages)을 요구하였으며, 새로운 디자인과 모델의 차량을 생산하도록 지시했다. 얼마후 어번자동차는 라이콤밍사에서 제작된 직렬 8기통엔진을 장착하기 시작했으며, 이들 차는 미국의 주요도로에서 가장 인정받은 프레스티지카중의 하나가 되었다. 판매는 급증하였고, 코드는 회사의 성공과 함께 미국 비즈니스계의 해성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코드는 제너럴 매니저에서 사장으로 인명되었다.
그리고 1926년 듀센버그, 1927년 라이코밍을 합병하였다.
그는 이러한 급속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코드(미국의 첫 번째 프론트 드라이브 자동차)와 듀센버그J를 시장에 내놓았다.
1929년 경제공항이 시작되었으나 기본값 8천500달러에 코치빌더의 손을 거치면 2만달러 가까이 되는 듀센버그J는 큰 인기를 누렸다. 코드는 최고의 디지이너와 엔지니어, 마케팅전문가들을 그의 회사에 영입하였으며, 월스트리트에서도 성공한 기업가로 비쳐졌다.  그러나 30년대 불어닺친 불경기는 자동차 판매에 타격을 주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1937년 코드그룹은 도산하게 되었으며 그해 8월에는 자동차생산을 중단하게 되었다.
처음에 코드는 그의 아내 헬렌 프리체(Helen Frische)와 두명의 아들(Charles와 William)과 함께 어번에서 살았는데 1930년 그의 아내가 사망하자, 버지니아 타페(Virginia Tharpe)와 결혼했다.
이후 그들에게는 3명의 딸들이 있었다. 코드의 가족들은 그들의 넓은 사유지가 있는 비벌리 힐즈의 고급주택과 코드그룹 사무실과 가까운 시카고에서 인생을 보냈다. 코드는 나중에 네바다로 이사하여 방송소유권,부동산 소유와 목장을 경영 하였으며, 민주당소속의 상원의원으로 정치적 경력도 쌓았다. 코드는 미주리주의 농장에서 태어났으며, 중간키의 야윈몸매로 현실주의자로 직접적인 대화를 중시하였다. 또 그는 사회와 위선적인 말투,향락주의를 싫어했다.
에레트(Errett)는 부모님의 결혼을 집전했던 목사의 성이었으며, 로반(Robban)은 그의 어머니의 결혼전 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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