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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르톤 세나 Ayrton Senna (1960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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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1:58 조회6,0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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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5월 1일 일요일 산마리노 이몰라 그랑프리. 당시 34세였던 브라질의 영웅 아이르톤 세나는 윌리엄즈-르노 머신을 몰고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피트 지역 바로 뒤쪽의 탐부렐로(Tamburello) 좌코너를 시속 306km의 속도로 진입하던 그는 컨트롤을 잃고 18m를 날아가 콘크리트 벽에 충돌하고 말았다. 충돌 당시 속도는 시속 217km. 충격으로 오른쪽 앞바퀴가 분리된 머신은 사방으로 파편을 흩뿌리며 트랙 가장자리까지 퉁겨져 나갔다. 즉시 적기가 발령되고 레이스는 중단되었다.
그는 즉시 헬기 편으로 볼로냐의 마지오르(Bologna's Maggior) 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그리고, 저녁 6시 40분, 그의 죽음이 공표되었다.
사고 다음날 브라질 국기에 덮인 관이 검은색 벤츠에 실려 볼로냐 공항을 향했다. 수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나는 영원히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 공군기가 사웅파울로행 연결편이 있는 파리까지 시신을 운구했다. Varig 항공 RG723이 파리를 출발, 브라질 영공에 다다르자 브라질 공군 제트기들이 호위했다.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다.

아이르톤 세나는 1960년 3월 20일 사웅파울로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둘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이, 밑으로 남동생 하나가 있었다.
네 살 되던 해에 아버지는 그에게 고카트(go-kart)를 만들어 선물했고, 일곱 살이 될 때까지 어린 소년은 고카트를 타고 자기 집 목장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닌 것은 물론, 트랙터를 비롯한 농장 내 운전 가능한 모든 것을 운전하게 되었다.

1973년 열세 살 소년 세나는 사웅파울로 인터라고스(Interlagos) 써킷에서 레이싱 카트 시리즈 참가를 시작으로 1977-78년 남미 카트 챔피언 2연패, 1978-81년 브라질 카트 챔피언 등 화려한 전적을 쌓았다.
1981년 세나는 포뮬러 포드 1600 제작 업체 중 가장 뛰어난 곳 중 하나로 영국 노포크(Norfolk)에 있는 반 디멘 공장에서 짐 러셀 레이싱 스쿨의 정비사였던 랠프 퍼맨(Ralph Firman)을 만나 레이싱계에 입문하게 된다. 그 해 3월 그는 반 디멘 RF81을 타고 우승을 따냈고, 영국 포뮬러 포드 부문의 양대 타이틀을 획득했다. 1982년 말에는 트럭스턴(Thruxton) F3 비선수권 부분에 출전해 가볍게 폴투윈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1983년에는 F1 진출을 염두에 두고 F3 전영국 챔피언십 시리즈에 출전하여 9 경기를 내리 이기는 기염을 토하며 타이틀을 차지했다. 그는 분명 F1으로 가는 길의 선두에 있었다. 시즌 중 윌리엄즈(Williams)와 맥라렌 (McLaren)에 의해 F1 테스트를 거쳤고, 톨맨-하트(Toleman-Hart) 팀에 입단한다. 이제 그랑프리 무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세나가 톨맨 팀 단장에게 한 말이다. "그러나 차가 따라주지 않는다면 다른 팀으로 갈 것이고, 당신이 이적을 막으려 한다면 은퇴할 것입니다."

세나는 톨맨 팀의 TG183B를 타고 브라질 그랑프리에 데뷔, 16위로 예선을 마쳤으나, 본선에서는 9랩 만에 리타이어하고 말았다. 두번째 레이스인 남아공의 키알라미(Kyalami) 그랑프리에서는 예선 13위, 본선 6위를 기록했다. 본선에서는 메인 스트레이트(직선주로)를 주행하던 중 계기판을 보는 사이 다른 차량의 파편을 맞은 머신의 노우즈콘(nose-cone : 경주차 앞머리의 뾰족한 부분)이 날아가서 스티어링이 엄청나게 무거워졌음에도 사투 끝에 6위로 경주를 마친 것이다.

1984년 모나코 그랑프리는 그가 위대한 선수로 발돋움하는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프랑스의 알랭 프로(Alain Prost)가 맥라렌(McLaren) 머신을 몰고 선두를 잡고 있었고,로터스의 만셀이 그 뒤를 따랐다. 7랩까지 7위를 유지하던 세나는 점차 노련한 드라이버들을 하나씩 따돌렸고, 만셀이 미끄러지며 움찔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바로 2위로 치고 올랐다. 총 77랩 중 30랩을 마칠 즈음 세나는 프로 뒤를 바짝 따르고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려서 시야는 최악이었고, 32랩이 거의 끝날 즈음 비 때문에 더 이상 경기 진행이 어려워지자 적기가 내걸렸다. 세나에게는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19985년 세나는 로터스(Lotus) 팀으로 이적하여 포르투갈과 벨지움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따냈고, 1986년에는 스페인과 미국 디트로이트 그랑프리에서 우승을 낚았다. 1987년 로터스 팀과 세나는 한계를 느끼던 르노 엔진을 포기하고 혼다 V6 터보엔진을 얹었으나, 새 머신은 에어로다이나믹스 효과가 떨어졌고 이전의 르노 엔진을 얹었을 때보다 단점이 더 많은 듯 했다. 게다가 컴퓨터 제어의 액티브 서스펜션은 의도와는 달리 머신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그는 모나코와 디트로이트에서 우승을 거두었다.

1988년부터 세나는 맥라렌 머신을 몰게 된다. 그의 전성기가 막 시작되는 참이었다. 이후 맥라렌에서 여섯 시즌을 뛰는 동안 그는 무려 41승까지 승수를 늘렸다. 1988년 시즌은 맥라렌 팀의 독무대였다. 세나와 프로가 16전 중 15승을 차지한 것이다. 세나는 시즌 8승으로 생애 최초로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짐 클라크 (Jim Clark)가 25년간 가지고 있던 단일 시즌 7승의 기록도 깨지게 되었다.

1989년 혼다 3.5리터 V10으로 무장한 맥라렌 팀은 막강 군단이었다. 그러나 고참 프로와 신예 세나, 이 두 천재 드라이버 간의 갈등은 시한 폭탄이었다. 세나가 챔피언이 되기 위하여는 일본과 호주 그랑프리를 연이어 이겨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 간의 갈등은 급기야 스즈카 그랑프리에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된다. 세나는 폴포지션을 잡았으나, 2그리드에서 출발한 프로에게 추월당했다. 47랩 째 시케인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돌진하던 세나는 프로의 앞으로 머신을 들이밀었다. 세나와의 갈등을 피하기 위해 이전에도 여러 번 양보해 오던 프로였던지라 세나는 이번에도 전과 같은 상황을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는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두 대의 맥라렌 머신은 충돌하여 미끄러지며 코스에 멈추고 말았다. 순간 프로는 벨트를 풀고 머신에서 뛰어나왔지만, 세나는 다시 출발하여 경주에서 이겼다. 그러나 세나는 시케인을 제대로 통과하지 않았다 하여 우승을 몰수당하고 말았다. 1989년 챔프는 프로였다. 이 사건 뒤 프로는 페라리로 이적했다.

1990년 시즌, 스즈카에서 페라리의 프로와 맥라렌의 세나는 다시 격전을 치룬다. 폴 포지션을 잡은 세나는 프로의 페라리 머신이 오른쪽으로 감아 들어오는데도 그대로 들이받아 둘 다 모래 밭으로 처박히고 말았다. 프로는 시즌 챔프의 꿈을 접어야 했고 세나가 챔프가 되었다. 이 사건으로 레이스계는 발칵 뒤집혔다. 프로는 "세나는 양심불량이다. 레이스는 스포츠이지 전쟁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1991년 역시 세나의 해였다. 개선된 혼다 V12 엔진을 얹은 맥라렌-혼다 MP4/6 머신을 타고 개막전부터 내리 4승을 챙겼다. 4승 모두 폴투윈 이었다. 시즌 7승으로 챔프 타이틀은 그의 것이었다. 이로써 세나는 세계챔피언타이틀을 3회나 차지하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1992년은 그에게 있어 너무나 불만족스러운 시즌이었다. 다음 시즌 윌리엄즈로 이적하려 했으나 프로의 비토로 좌절되기도 했다. 승수는 3승. 1993년 빗속에서 치러진 도닝턴 파크(Donington Park)에서의 유러피언 그랑프리는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멋진 경기로 회자되고 있다.
비극의 1994년, 세나는 윌리엄즈-르노 팀으로 이적해 새로운 시즌을 맞는다. 개막전부터 내리 세 경기에서 폴포지션을 잡았다. 그러나 제3전, 비운의 이몰라(Imola)에서 모든 이야기는 끝났다. 영웅의 퇴장이었다.
 
세나는 뛰어난 기량으로 많은 팬들이 있었지만, 한편으론 파격적인 성향 때문에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단체 사진에 끼어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약간 떨어져 자리잡고 있는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자연인으로서의 세나는 고향 사랑이 남달랐고, 사생활을 중시했다. 첫번째 결혼에 실패한 후에는 일단의 미녀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나에게 있어 우선순위는 승리였다. 그는 언제나 단언했다. "나는 이기기 위해 프로그램되어 있다.", "나는 나를 이기게 해주는 차보다는 경쟁하고 싶도록 해주는 차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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