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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스타 피닌파리나 Battista Pininfarina (1877~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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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3:02 조회12,59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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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닌파리나의 원래 성은 파리나였다. 그의 성이 피닌파리나로 바뀐 것은 1961년으로 이탈리아 사회와 산업에 대한 그의 업적들을 높이 평가하여 파리나의 애칭인 "피닌"을 결합한 피닌파리나로의 개명을 대통령령으로 인가하면서 부터다.  
피닌(Pinin)은 '작다'는 뜻으로 설립자인 바티스타의 키가 작아 불리던 애칭이었다.
피닌파리나는 1893년 11월 2일,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11세때 그는 스타빌리멘티 파리나(Stabilimenti Farina)라는 그의 형 지오반니(Giovanni)의 자동차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동안에 그는 "Aviatic" 훈련용 비행장 건설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920년에 그는 로사 코파소(Rosa Copasso)와 결혼했다. 그들은 기안나(Gianna,1922)와 세르지오(Sergio,1926) 2명의 아이들을 낳았다.
1920년 미국의 발전상을 보기위해 미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디트로이트에서 핸리 포드를 만났는데, 그는 피닌파리나가 미국에 머물면서 포드자동차에서 근무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피닌파리나는 이탈리아로 돌아가기를 희망했다. 잠깐동안의 미국방문은 피닌파리나로 하여금 큰 감명을 받게 하였다. 새로운 기술정보와 민간기업들의 활동상을 눈여겨 본 피닌파리나는 그의 생애에 새로운 도전을 하리라 결심하게 된다.
1921년 비록 레이싱 차량이 아닌 그의 소유의 차량이었음에 불구하고 아오스타-그랜 산 베르나르도(Aosta-Gran San Bernardo) 레이스에서 우승하기도 하였는데, 이때 수립한 그의 기록은 11년동안이나 깨지지 않았다.
1930년 그는 그의 형의 공장인 스타빌리멘티 파리나(Stabilimenti Farina)를 떠나  카르체리아 피닌파리나(Carrozzeria Pinin Farina)를 설립하고 독립하였다. 그의 처음 계획은 수작업차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후 수작업 단계를 넘어서는 좀더 포괄적인 작업을 목표로 했다. 그는 바디 제조업을 독립적인 산업으로 바꾸고 싶어했다. 그래서 그의 공장에 장비와 인원을 확충하였으며, 짧은 기간동안에 하루당 7~8대의 차량들을 소량 생산할 수 있는 생산 라인을 구축했다.  이렇게해서 2차세계대전 직전에는 코르소 트라파니(Corso Trapani)에 있는 그의 공장에서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차량 바디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 차들은 미래에 출현할 자동차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이어서 피닌파리나는 외국의 자동차 메이커와도 접촉을 확대하여 전세계적인 협력체계를 구축했지만 전쟁은 이러한 협력체계를 중단시켜 버렸다.
전쟁이 끝난후 피닌파리나는 다시 디자인과 생산을 재개하였고, 1946년에는 드디어 "이 시대 최고의 모델 8대중 한 대", "움직이는 예술"이라며 찬사를 받으며 뉴욕현대미술관에 영구 전시된 치시탈리아(Cisitalia)를 선보였다.  그것은 자동차 디자인의 아름다움과 단순함을 가장 조화롭게 표현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으며, 세계대전 전후 시대의 자동차의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전쟁이 끝난직후부터 몇 몇 자동차 제작사로부터 피닌파리나와의 협력관계를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서, 당시 미국의 디트로이트에 있던 내시자동차와 협력관계를 재개 하였다.
1952년에 피닌파리나는 그가 디자인한 "엠버서더(Ambassador)"를 통해 미국시장에 정식으로 복귀하였으며, 토리노 공장에서 "내시 힐리(Nash Healey)"를 디자인하고 소량 생산하였다.
그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으며 존경받는 디자이너의 이름으로 미국 자동차회사의 초기 역사에 큰힘을 보탰다. 다음해에는 더 많은 자동차 제작사들이 새로운 자동차를 선보이기위해 그에게 디자인을 의뢰 하였다. 그것에 힘입어 그는 1958년 새로운 75,000 제곱미터의 지역에 건평이 40,000 제곱미터의 새로운 공장을 신축하였다. 이후에 이 공장은 102,500 제곱미터
에 건평이 50,000 제곱미터로 늘어 났는데 이것은 생산과 인원의 현저한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954년 발표한 알파로메오 줄리에타 스파이더는 2만7천 대가 생산되면서 상업적 생산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대기업에서 만드는 스페셜티카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맡게 되었다. 자체개발과 함께 완성차를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 것이다.   피닌파리나를 얘기할 때는 페라리를 빼놓을 수 없다. 1950년대 경주차를 도로용으로 개조해 품질에 문제가 많았던 페라리는 1952년 창업자 엔초 페라리가 피닌파리나와 손잡으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치시탈리아와 비슷한 스타일의 212가 첫 모델이었다.   피닌파리나는 이후 페라리 테스타로사, 356GT/4, F40, F50, 미토스  등의 명차를 만들어냈고, 피아트 130 쿠페, 란치아 베타 몬테카를로, GM 크로노스 등 독창적이고 뛰어난 스타일을 디자인했다.
196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후에도 그는 피닌파리나의 일에 부분적으로 관여하였으나 대부분의 시간들을 문화,자선활동등으로 보냈다.
기술과 미학의 결합을 중시하며 이태리의 정열적인 스포츠카 페라리를 뛰어난 성능과 함께 '예술품'으로 평가받게 만들었던 매혹적인 디자이너 피닌파리나는 1966년 4월 3일 생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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