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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포드 Henry Ford (1863~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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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월하 작성일17-12-24 12:57 조회5,23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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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상 20 세기 전반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을 뽑으라면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과 자동차왕 헨리포드이다.
헨리포드는 1863년 디트로이트 부근 디어본에서 아일랜드계 이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동차왕 헨리는 어릴 때부터 기계를 가지고 노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특히 고장난 시계는 모두 거두어 말끔히 고치는게 취미였다.  포드가 13세 되던 1876년에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디트로이트에 갔다가 이야기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보고 홀딱반해 버렸다.
헨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증기자동차로 달려갔다.  "우와! 신기하다. 말로만 듣던 증기자동차를 직접 보게 되다니! 그런데 아저씨, 이 자동차는 어떻게 말이 끌지 않는데도 저절로 가지요?",  "아저씨, 이건 뭐예요?" 헨리는 운전사가 귀찮을 정도로 증기자동차의 원리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그의 꿈은 '시계박사'가 아닌 '자동차박사'로 바뀌었다.  증기자동차에 대한 호기심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한번은 학교 담벼락 옆에서 증기를 이용한 실험을 하다가 보일러가 터지는 바람에 불이 날 뻔한 적도 있었다.  헨리는 농부인 아버지의 뒤를 이어 농사를 짓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에서 일하고 싶었다. 결국 그는 16세 되던 1876년 청운의 뜻을 품고 디트로이트로 가서 '미시간 차량회사'라는 기계제작소에 들어갔으나 겨우 일주일 후에 해고되고 말았다.  아무도 고치지 못한 기계를 헨리가 30분만에 고친 것이 이유였다.  이 젊은 청년 때문에 자기 자리를 빼앗길까봐 겁이난 공장장이 쫓아낸 것이다. 이후 그는 여러 회사를 다니면서 기술을 익혔고, 드디어 뛰어난 기술자가 되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발명왕 에디슨이 세운 '에디슨전기회사'가 있었는데 그는 일터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전기에 관한 지식을 배웠으며, 본격적으로 자동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189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드디어 2기통짜리 엔진을 부엌 싱크대 위에서 완성한후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1896년 5월 드디어 최초의 4륜마차 차체에 2기통 가솔린엔진을 장착한 "쿼드리사이클(Quadricycle)"을 완성하였다.  그는 몹시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하지만 아뿔사 작업실 문이 자동차보다 작아 나갈 수가 없었다.  헨리는 도끼를 들고와 문과 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도끼소리에 놀라 잠이 깬 식구들 앞에서 자신이 만든 1호차를 당당히 올라탔다.  시운전은 성공이었다.  2인승,4마력,시속45km의 이차는 친구에게 200달러에 팔렸다. (지금 이차는 포드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에디슨은 10년이나 아래인 포드를 격려 하였다. 이때부터 발명왕과 자동차왕은 깊은 우정으로 맺어진다.
한편 그는 자기차를 선전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가 서른 여덟살이었을 때, 자동차 경주에 참가하여 최고 시속 72km로 미친 듯이 달렸는데 그 당시 시속 72km는 요즘으로 치면 비행기를 탄 것과도 같은 어마어마한 속력이었다.  덕분에 헨리는 우승을 차치했지만 죽을뻔한 모험이었다.
1903년 6월 자본주들의 자본을 모은 15만 달러로 포드자동차 회사를 정식으로 발족 시켰다.  그러나 당시 자동차는 신기하지만 고장이 잦고 시끄러우며 비실용적인 사치품에 불과 했다. 때문에 포드가 은행에서 대출을 요청하자 은행장은 "멀쩡한 말들이 이렇게 많은데 자동차 사업이 되겠는가?"라며 대출을 거절했다는 일화도 있다.  한편, 포드는 이회사를 세우면서 혼성주주제 라는 새로운 창업법과 경영법을 도입한다. 회사의 일정 지분을 투자자에게 배분하는 방법으로 남의 기술과 돈, 그리고 공장과 기계시설을 이용해 차를 만들었던 것이다.
경쟁사를 이기는 길은 자동차를 서민들이 생활에 이용할수 있도록 값이 싸고 실용적인 차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한 포드는 1903년 7월 2기통엔진의 자동차를 시작으로 1908년 혁명적인 자동차 포드 T형을 개발하였다.  이 포드 T형은 1927년 단종 될때까지 1.500만대를 만들어 20세기 전반 전세계의 자동차 시장을 독점한 자동차왕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신제품 차를 소개한 것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관리방식과 경영시스템을 도입한데 있다. '부자들의 장난감인 자동차를 서민들의 생필품으로 바꾸겠다'는 신념이 포드의 자동차 왕국 건설을 가능케 했다.  이러한 창업 정신은 1913년 컨베이어 벨트 생산방식의 탄생으로 이어져 자동차 대량생산의 기틀이 마련됐다.  그는 컨베이어시스템을 통해 1공정에 18분이 걸리던 제조시간을 5분으로 단축했다.  이를 통해 다은 자동차가 2천달러를 호가할 때 포드사의 모델-T 값을 2백60달러로 낮출 수 있었다.  자동차는 중산층의 대두와 자동차의 대량생산으로 보통사람들의 필수품이 되기 시작했으며 거대한 미국 경제력의 밑받침이 되었다.  그는 1947년 84세의 나이로 뇌졸증으로 사망하였다.
새로운 발상으로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된 그는 중산층의 우상이자 국민적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무자비한 자본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도살장의 해체라인을 자동차 조립라인으로 바꾼 것이나 평균일당의 두배가 넘는 5달러 발상을 한점에서 그는 천재였다.  5달러 일당은 비용보다 훨씬 많은 이익을 가져왔기 때문에 그는 '가장 경제적인 발상이었다'고 흡족해했다.  포드는 노동통제를 위한 장치들을 고안하는데도 천재였다.  그의 공장에는 작업시간에 화장실을 자주가는등 비적격자를 골라내기위해 '감시조'가 편성됐고 감시조에 걸린 사람들은 해고 전단계인 '대기조'로 분류됐다.  권투선수였던 해리 베네트나 전과자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해 악명을 떨쳤고 노동조합은 자동차회사들중 가장 마지막으로 1941년에 도입했다.  한때 포드사에는 '사업주의 첩자자 자동차만큼이나 많다'는 말이 돌았다.  그는 반유태주의자이면서 히틀러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디어본의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스스로를 농부의 아들이자 노동자로 생각했고 사치를 혐오했다.  33세에 처음 자신의 손으로 자동차를 만들었을 때부터 그는 누구나 탈 수 있는 값싸고 튼튼한 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성격상 그 꿈은 '필연'이었다.  또한 기계에 대한 그의 지대한 관심이 없었다면 컨베이어벨트를 실험하고 도입하는일은 없었을 것이다.  스스로 "내가 '현대'를 발명했다"던 그는 신화와 그 신화를 벗기려는 비평가들의 혹평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할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오늘과 내일(Today and Tomorrow) 1926", "나의 산업철학(My Philosophy of Industry) 1929"등이 있다.
한편, 포드는 1999년말 미국 라스베가스에서 있었던 세기의 차 선정위원회에서 20세기 최고의 기업가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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