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립자 정주영 |
개인에게 좌우명이라는 것이 있듯이 기업에도 기업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한 회사의 기업정신은 대부분 그 회사 최고경영자의 가치관에 따라 큰 방향이 정해지기 마련이다. 현대도 설립자인 故 정주영 명예회장의 영향을 받아, 조그만 가능성에도 신념을 갖고 대담하게 돌진한다는 '불도저 정신'으로 흔히 회자된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정신은 실제 정부 주도의 수출형 공업화 정책이 펼쳐졌던 1970, 80년대의 시대분위기와 맞물려 지금의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현대그룹에서 독립하긴 했지만, '현대'라는 이름을 대표하는 회사라고 할 수 있는 현대자동차 또한 '자동차'라는 아이템이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지금의 규모까지 발전해 올 수 있었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간섭은 싫다-GM을 버리고 포드를 선택한 현대 20대의 정주영은 1941년에 '아도서비스'를 통해, 해방 후인 1946년에 '현대자동차공업사'를 통해 자동차 정비업을 하면서 자동차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주로 미군 군수차량이나 일본 자동차를 수리해 주었는데, 정주영은 자동차 메커니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덕분에 높은 품질의 서비스로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건설에 대한 수요증대로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와 '현대토건사'를 통합하여 '현대건설'을 설립하게 되면서, 자동차 정비업은 자동차 제작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17년 동안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 기간 동안 현대는 건설업으로 자본을 충분히 축적했을 뿐 아니라, 1962년 정부는 자동차를 수출 주도 산업으로 지정하여 '자동차공업 5개년 계획'을 발표함으로써 자동차 생산을 위한 여건과 분위기가 조성될 수 있었다. 당시 활동한 자동차 회사들 중에는 하동환자동차공업, 기아산업, 아시아자동차, 신진자동차 등이 있었다. 이렇게 자동차 산업이 발전할 수 있는 분위기가 무르익을 1967년 드디어 '현대자동차'가 설립되었다.
| 코티나 |
현대자동차가 설립되던 1960년대만 해도 SKD(Semi Knock Down) 또는 CKD(Complete Knock Down)같이 해외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 생산하는 수준의 시기였고, 현대 역시 설립을 준비하던 단계부터 파트너가 필요했다. 당시 현대가 고려하는 대상은 GM과 포드였는데, GM은 해외의 자회사도 100% 지분을 가져 경영까지 직접 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독자 경영을 고집한 정주영은 GM보다는 '약간의 자본참여와 측면에서의 경영지원'만을 제시한 포드를 선택했다. 포드와 기술, 조립 계약 체결을 통해 1968년 첫 모델 코티나가, 1969년 포드 20M이 선보였다.
| 현대 울산 공장 조감도 |
최초의 고유모델 포니 자동차공업육성 정책과 자본력에 힘입어 현대자동차는 자동차산업에 뛰어들자마자 주요 메이커가 되었다. 그리고 1975년 울산에 대량생산 설비가 갖추어진 종합자동차공장을 완공해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 포니 | 울산 공장 완공과 더불어 나온 첫 모델이 한국 최초의 고유모델이기도 한 포니였다. 당시 한국 정부는 각 업체에 국산 자동차 개발을 위한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게 하며 국산 자동차를 생산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현대 역시 이에 발맞춰 기존 파트너였던 포드와 협약을 추진했으나 입장 차이로 무산되고, 이탈리아의 쥬지아로에게 디자인을 맡겼던 것이다. 포니는 쥬지아로 디자인에, 1,238cc 직렬 4기통 미쯔비시 엔진을 얹은 전형적인 FR 방식 세단이었다. 포니는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 자체 고유모델로, 1975년 출시되자마자 내수시장과 수출시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 엑셀 | 국내 최초 앞바퀴굴림차, 국내 최초 미국 수출차: 엑셀 현대는 설립 초기부터 '수출만이 살 길이다'라는 명제를 충실히 지키는 경영을 했다. 포니의 성공에 이어, 1985년 국내 최초로 앞바퀴굴림을 적용한 엑셀을 발표해 역시 국내외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었다. 엑셀 역시 수출을 염두에 두었으므로, 해외시장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진 포니를 사용해 '뛰어난 포니'라는 이름 '포니엑셀'로 처음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1986년 우리나라 차로는 처음으로 미국시장에 수출되어, 수출 첫 해부터 203,000대, 3년간 백만대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엑셀이 미국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데는 당시 기본형 4,99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장이 잦고 마무리가 깔끔하지 못해 이미지 면에서는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 쏘나타 | 중형차 시장을 석권한 쏘나타 1988년 선보인 쏘나타는 100% 독자기술은 아니지만, 차체 디자인부터 설계, 시작차 개발, 시험주행, 양산체제 구축의 전과정을 국내에서 소화해냈다는 의미가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당시까지만 해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중형차 수출이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으나, 해외보다는 국내 수요가 훨씬 많았다. 파생 모델로 쏘나타 II, 쏘나타 III, EF 쏘나타, 뉴 EF 쏘나타가 있으며, 1996년 단일모델로는 국내 최초로 100만대 이상이 생산되면서 지금까지 중형차 시장을 장악해 온 현대의 대표적 모델이다.
한국의 대표메이커 | 알파엔진 | 현대는 독자적인 기술개발에 있어서는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오랜 시간동안 많은 노력과 자본을 투입한 메이커라고 알려져 있다. 1991년 1월 알파 엔진과 변속기를 개발한 것이 가장 큰 성과 중 하나인데, 엔진개발을 위해 필요한 설계부터 주조, 단조, 기계가공 등 전반에 걸친 자동차 관련 기술이 한 단계 발전했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기존 알파 엔진보다 25% 이상의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최저연비 엔진 개발에 성공했고, 이 엔진은 배기가스에 들어 있는 질소화합물의 양도 크게 줄었다. 이로 인해 선진국들의 까다로운 에너지절약, 환경 규제를 극복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기술개발과 함께 꾸준히 국내 시장의 점유율을 높여 오던 현대는 1998년 표류상태에 있던 기아자동차를 인수함으로써 한국 자동차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게 되었다. 현재 2002년 아토스 같은 경차부터 대형 에쿠우스를 비롯하여 테라칸 같은 RV까지 다양한 종류의 모델을 생산 중이며, 중국,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베네수엘라, 이집트, 터키 등 세계 각국에 생산공장을 두고 있는 한국의 대표 메이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