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들라지(Louis Delage)는 1874년 프랑스 코냑에서 태어났다. 31세에 터간 포이(Turgan Foy)와 푸조(Peugeot)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푸죠(Peugoet) 근무시절 동료인 어거스틴 레그로스(Augustine Legros)와 함께 프랑스 르발루아(Levallois) 지역에 모터 엔지니어링 워크샵을 설립하였다.</iw_replace> <iw_replace>들라지는 항상 자동차 경주에 관심이 있었다. 그의 디 디옹(De Dion) 엔진을 탑재한 모델이 1906년 브와뚜렛 경주(Coupe des Voiturettes)에서 2위를 차지하였고, 2년 후에는 우승을 차지하였다. 자동차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들라지는 몇 년 만에 자신만의 엔진과 구동장치를 생산하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수품 조달을 통해 큰 수익을 달성하였고, 이후에는 찰스 플랑숑(Charles Planchon)이 설계한 2리터 디젤 엔진(DE)을 통해 자동차 업계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이후 고지식한 들라지는 플랑숑의 시기 상조한 10.7리터 V형 12기통 엔진이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강제로 폐기되자 그 자리에서 플랑숑을 해고하였다.
들라지 자동차는 경주에서 자주 이기기는 했지만 그랑프리 경주용 자동차는 너무 비싸서 루이 들라지는 경제적으로 어렵게 되었다. 회사 이름으로 5회의 주요 대회를 우승했지만, 결국 1927년 말에 경주 참가를 중단하였다.
들라지 중 몇몇 훌륭한 모델은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생산된 것들이지만, 당시 경제적 불황으로 판매가 부진하여 1934년 회사는 자금난에 봉착하였다. 충분한 시험을 거치지 않고 성급하게 출시한 소형 엔진 차량은 들라지에게 악평을 가져다 주었다. 1935년에는 회사의 모든 자산을 들라지의 파리 지부 에이전트인 월터 와트니(Walter Watney)가 인수하였다. 그는 대부분의 기술 부서를 매각하고, 들라예(Delahaye)의 스타일에 들라지의 배지만 붙인 자동차를 생산하도록 들라예와 계약하였다. 들라지는 이러한 형태로 1953년까지 이런 형태의 생산을 계속하다가, 다음 해에 들라예, 호치키스(Hotchkiss)사와 함께 합병하였다.
루이 들라지는 회사의 명목상으로만 이사 직책을 맡고 있었지만, 자산 대부분을 회사와 함께 잃어버렸고, 73세에 가난하게 생을 마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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